여순 사건 다이어리: 6. 여수 순천 탐방 일지 ①
[활동/여순 청년 서포터즈] - 여순 사건 다이어리: 5. 시월, 우연한 전시 ② 여순 사건 다이어리: 5. 시월, 우연한 전시 ② [활동/여순 청년 서포터즈] - 여순 사건 다이어리: 4. 시월, 우연한 전시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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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연대 주둔지
강의실을 나와서 먼저 향한 곳은 당시 14연대의 주둔지였다. 여수군 여수읍 신월리에 위치한 곳으로, 바로 옆에 한화 여수 공장이 위치해 있다. 보안 상의 문제로 공장 방향을 촬영하면 안된다는 것을 사전에 듣고 이 포스팅에 업로드된 사진들을 촬영했다.


14연대를 이해하려면 당시 군대 제도를 이해해야한다. 현대의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로, 장교 아닌 사병들은 관할 지역이 고향이었다. 14연대가 담당한 은 다음과 같다. 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고흥, 보성으로 여섯 지역이다. 한 연대의 정규 인원은 2781명으로 3천명이 다 되지 않았다. 당시 막 해방했을 무렵이기에 배를 곯지 않으려 들어간 이들이 많았다. 군대에서도 해결이 안되면 나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2500명이 될락말락 했으리라고 보셨다. 항쟁이 일어나면 지역연대를 하는 것이 당연했던 것.
모든 세계 역사에서 저항사를 살펴볼 때는 두 부류를 달리 봐야한다고 하셨다. 지도부와 민중들. 대부분이 운동이 그러하듯 본인이 속한, 본인이 직접적으로 처한 문제에 저항을 한다. 명분이 없으면 벌이지 않는 것. 14연대의 봉기도 마찬가지. 10월 20일 제주로 가서 자국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은 군인의 사명과 맞지 않았다.
지도부는 이를 이용하여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 두 가지 문제를 선동하여 군대를 장악했다. 첫째, 경찰 아래의 군인들이 경찰과 벌어진 갈등을 추동시킴. 둘째, 다른 지도부들이 고기 등의 식량을 먹고 부실한 식사를 사병들에게 나눠주어 많은 군인이 이탈함. 예시로, 14연대 핵심인물이었던 김지회 중위 식량배분을 적절히 하여 배곯지 않는 상황을 만들면서 이탈자를 최소화 하였음. 부대를 장악하는데 4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14연대 부대는 100만평 정도의 넓은 부지를 지녔는데, 장악하기까지 4시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탈자나 거부하는 사람 없이 쉽게 동참한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기다랗고 좁은 통로를 지나가면 중간에 커다란 벙커식 공간이 드러난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당시 중학생들을 근로 보급대라는 이름 하에 학교마다 2개월씩 파병되어 강제 노동을 시켰다고 한다. 철근이 없는 무근콘크리트로 제작되었는데 80년이 지나도 멀쩡했다. 매우 견고하게 제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통로는 이중 문턱으로 되어 있고, 내부를 만든 뒤에 흙으로 덮어 산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촬영은 채 못했지만 입구에서 한참 위로 카메라를 올려야 언덕 꼭대기가 드러난다. 그 높이만큼 흙을 쌓아 덮은 것인데, 나는 설명을 듣기 전까지 이미 있는 산, 언덕 안에 굴을 판 것인 줄로만 알았다. 일제 강점기의 군사시설을 대부분 이렇게 제작되었다고 한다.
본래 일제강점기에 해군 202부대의 진지로 사용하던 곳이었는데, 태평양 전쟁 군수품을 전쟁터로 전달하는 데에 중요한 시설이었다. 무기나 탄약 등을 보관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를 위해 미평역까지 신월리에서 철도를 잇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 일본 군이 철수하고 빈 막사로 남은 것을 14연대가 사용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 육군 병원이 들어서기도 했는데, 당시 군인을 감축하기 위해 국방부를 지금의 보건복지부처럼 넘겼다고 한다. 그렇게 여수 보호병원으로 변경되었으나, 처우 문제로 여순 이후 다시 들고 일어서게 된 곳이라고 덧붙이셨다.
1942년 8월경 가막만 앞바다가 ㄷ자형으로 천연요새 형태의 신월리 지형을 이용해 여수항공기지(해군 202부대)를 건설된다. 단순 해군기지가 아니었다. 태평양전쟁의 군수품을 만들어 일본과 동남아시아 전쟁터로 가져가기 위해 군사시설이었다. 일제는 군수품을 이동하기 위해 미평역까지 철도(신월리)로 건설했다. (...) 대표적으로 신월동 한화여수공장의 한가운데 있는 굴뚝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여수넷통뉴스] 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①
진남관 인민대회
일제강점기, 항구도시인데다 국토 외곽지역이라는 것을 이점 삼아 경제 수탈 기지로 활용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빠른 산업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대형 공장이었던 천일고무공장도 위치해 있었다. 여수 이순신광장 로터리 주변에 진남관이 보인다. 당시에도 시내 상가, 순천 연결 도로, 경찰서나 역 등과 연결된 중심지였다. 14연대에 합세한 민중들은 진남관 앞에서 여수군 인민대회를 열었다.

당시 '인민'과 '동지'라는 단어는 일상적인 용어였다. 지금처럼 사용하는 데 있어서 이념과 고향을 먼저 물어야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이곳에서 개최된 인민대회는 결의안 6개항을 발표했다. 땅을 지키고 먹고 살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1. 오늘부터 인민위원회가 모든 행정기구를 접수한다.
2. 우리는 유일하며 통일된 민족 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을 보위하고 충성을 맹세한다.
3. 우리는 조국을 미 제국주의에 팔고 있는 이승만 정부를 분쇄할 것을 맹세한다.
4. 무상몰수・무상분배의 민주주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5.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모든 비민주적인 법령을 무효로 한다.
6. 모든 친일 민족 반역자와 악질 경찰관 등을 철저히 처단한다.
[여수넷통뉴스] 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④
군사요충지에서 공업화에 힘을 쓴 것이 천일 고무의 김영준 사장이었다. 이는 사업가이면서 일본에 군용기를 헌납한 반민족행위자로, 친일 인명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진남관 왼쪽 너머에 세워진 아파트 정도의 위치가 천일 고무 공장이었다. 당시 천일 고무의 고무신은 아주 유명하고 널리 쓰인 소위 '메이커'였다. 우익인사인 김영준은 이때 인민대회 위원회에 의해 처형당했으며, 인민위원회는 봉기 기간 동안 천일 고무신을 민중에게 배급했다. 그리고 후에 국군이 여순 진압작전을 진행하면서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을 봉기군으로 간주하여 군법회의에 넘기거나 사형하는 등의 기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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